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노기 마레스케 (문단 편집) === 일본군 경력 === [[메이지 유신|메이지유신]]을 거쳐 신정부군이 창설되자 [[일본 육군|육군]]에 소속, [[1871년]](23세)에 육군 [[소좌]]([[소령]])로 임관, 이후 평생 사용할 이름 '마레스케'로 개명했다. 1865년에 쿠데타로 조슈번의 정치상 실권을 잡은 [[타카스기 신사쿠]]나 [[이토 히로부미]] 등이 송하숙촌의 선배였으므로, 그 인맥에 많이 도움받아 빨리 출세할 수 있었다. [[1877년]](28세), [[세이난 전쟁]]에 참전. 군기를 [[사이고 다카모리]]군에게 빼았겼다. 이때의 패배는 노기의 자존심에 씻을수 없는 상처를 남겼으며, 죽을때까지 괴로워했다고 한다.[* 그가 남긴 유서에는 자신의 경력 중 수치스러운 부분에 대해 사죄하는 내용이 있는데, 제일 먼저 언급한게 이 사건이다. 두번째는 후술할 러일전쟁 때 수많은 젊은이들을 죽게 만든 것.] [[1887년]](38세), 승려 [[https://ja.wikipedia.org/wiki/%E4%B8%AD%E5%8E%9F%E3%83%88%E3%82%A6%E5%B7%9E|나카하라 도주]][* 임제종 승려로 도주(鄧州)는 [[법명]]이다. 난텐보(南天棒)라는 별호로 저작을 집필했기에 '난텐보'란 이름으로도 유명하다. 실은 난텐보는 도주가 들고 다니던 방망이의 이름인데 이것이 도주의 필명 겸 존칭이 된 것.]와 [[도쿄]]의 도린사(道林寺)에서 처음으로 만났다. 이때 도주는 욕설하는 등 영 승려답지 않아서 노기가 만나 본 뒤 실망했다는데 나중에 다시 만나 "칼의 평정심을 알려주십시오."라고 청하자 도주가 "그렇다면 내 앞에서 칼을 써 봐라."라고 했다고 한다. 노기가 머뭇거리자 도주는 "너 같은 놈이 여단장이랍시고 군인 정신을 운운하다니 사이비 무사다!" 하면서 들고 있던 방망이(난텐보)로 때렸다고... 노기는 그 후 도주 밑에서 칼 수행을 하고 도주는 노기를 인정하여 석초거사(石樵居士)란 호를 주었다고 한다.[* 석초(石樵)란 말은 '돌 장작' 정도로 해석할 수 있다. 돌이 장작이 될 리가 없으니 선승다운 역설적인 작명이다.] 노기는 이후 도주에게서 정신적으로 크게 영향을 받았다. [[1894년]](45세), [[청일전쟁]]에서 [[메이지 덴노]]에게 신임받았다. [[청일전쟁]] 이후 소장에서 중장으로 승진하고 1896년부터 98년까지 [[대만일치시기|대만총독을 지냈으나,]] 대만 내 한족들의 봉기를 제대로 진압하지 못하고 사임했다. [[1904년]](55세), 육군 대장으로 승진. [[러일전쟁]]이 발발하자 참전하여 [[203고지]], [[뤼순 공방전]]을 지휘했다. [[러일전쟁]]의 승리에 공헌했지만 [[반자이 돌격]] 같은 무모한 공격을 하여 [[일본군]]의 희생이 너무 컸기에 경질론이 대두되기도 했을 정도였다.[* 1차 공세에서만 제3군의 당시 전체 병력 5만 9백 명 중 사상자가 1만 5천 명, 3차 공세 때에는 5만 9천여 명이었다. (전사 1만 5390명, 부상 4만 3814명.)][* [[일본 해군]]은 원래 203고지만 점령하고 그곳에서 함대에 포격을 가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런데 만주군 총사령관 [[https://ko.wikipedia.org/wiki/%EC%98%A4%EC%95%BC%EB%A7%88_%EC%9D%B4%EC%99%80%EC%98%A4|오야마 이와오]]와 참모장 [[https://ko.wikipedia.org/wiki/%EA%B3%A0%EB%8B%A4%EB%A7%88_%EA%B2%90%ED%83%80%EB%A1%9C|고다마 겐타로]], 제3군 사령관 노기 마레스케 모두 뤼순항 전체를 점령해야 한다고 했고 상부에서도 빨리 점령하라고 계속 닦달하는 등 피해를 키웠으니 굳이 노기만 무능하다고 할 수는 없었다.] [[봉천 전투]]에서, 러시아군 지휘부도 무능하긴 했지만, 뤼순을 점령한 후 엄청나게 소모된 3군 소속 병력 3만 8천을 이끌고 거의 단독으로 3배가 넘는 러시아군과 4일간 격전을 치르며 전진하여 결국 [[봉천]]에 다다르기도 했으므로 아예 무능하다고 하기에는 어폐가 있다. 그리고 두 아들이 전사하는 개인으로서 슬픔을 겪었다. 당시 전사자들의 유족들이 노기를 죽일 기세로 몰려 들었으나 노기도 아들 2명이 전사했기에 넘어간 일도 있다. 당시 항구에 몰려있던 유가족들이 배에서 내리는 노기에게 달려들었으나, 노기의 양 손에는 두 아들의 뼛가루가 담긴 병이 들려있었다 한다. 노기는 자기 지휘 아래에서 젊은이 수만 명이 목숨을 잃었음에 관해 평생 죄책감을 느꼈다. 유가족들에게 눈물을 흘리며 사과하거나 전사자들을 배려해 많이 기부하고 많이 문병하기도 했고 팔다리를 잃은 군인들을 배려해 의수를 만드는 데 참가하기도 했다. 뤼순 공방전에서 다수의 불필요한 전사자가 발생했음에 책임지고 [[자살|자결]]하려 했으나 [[메이지 덴노]]가 "내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허락할 수 없다."라고 하면서 만류했다. 1907년(58세)에는 [[일본 황실|황족]]과 [[화족]] 전용의 관립학교 [[가쿠슈인]][* 패전 후 [[사립학교]]로 전환되었고 평민에게도 개방되었다. 단 말이 평민이지 여전히 상류층, 부유층들이 많이 다닌다.]의 원장이 되었다. 이것은 [[메이지 덴노]]의 뜻이기도 했다. 메이지 덴노는 미래의 덴노가 될 황태손 [[히로히토]]가 노기에게 교육받기를 원했기 때문이었다. 이후 1912년에 죽을 때까지 원장직을 맡았다. 노기 원장 시절에 히로히토 황태자, 훗날 히로히토 황태자의 비가 된 [[구니노미야 나가코]], 나가코의 사촌언니 [[나시모토노미야 마사코]]([[이방자]]) 등이 가쿠슈인에 다녔다. [[이방자]] 여사는 1984년 [[경향신문]]에 연재한 회고록 <세월이여 왕조여>에서 "가쿠슈인은 교칙이 까다로워 화려한 옷이나 [[리본]] 등을 허용하지 않았다.", "노기 장군은 매우 엄격하고 완고해서 여학생도 남학생처럼 취급했다." 하고 학창시절을 회고했다. [[히로히토]] 황태손(미래의 [[쇼와 덴노]])에게도 매우 엄격히 교육했다. 아프거나 비가 오지 않는 이상 걸어서 등교하게 하고 [[히로히토]]에게 자신을 보면 언제나 경례하라고 지시했다. 이때 활력 없는 히로히토에게 체육을 많이 교육할 것도 지시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